서 기찬
kcsuh63@hanstar.net | 2014-11-30 22:37:51
2012년 영국의 영화비평지 ‘사인트 앤드 사운드(Sight & Sound)’가 전 세계 유명 영화감독 358명에게 ‘자신이 선정하는 베스트 영화 톱10’을 제출하게 해 집계했습니다. 한국에선 봉준호, 홍상수, 양익준 감독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지난 1952년부터 10년마다 영화감독을 포함한 스태프, 평론가, 기자들이 뽑은 베스트 영화를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2012년에는 ‘현기증(1958, 알프레도 히치콕)’이 50년째 1위를 한 ‘시민 케인(1941, 오손 웰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지요.
2012년엔 감독이 뽑은 베스트 영화를 처음 선정했습니다. 1위는 ‘동경 이야기(1953, 오즈 야스지로)’, 2위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스탠리 큐브릭)’, ‘시민 케인(1941, 오손 웰스)’이 공동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히치콕의 ‘현기증’은 여기서는 ‘대부(1972,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공동 7위입니다.
오늘은 ‘동경 이야기’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작품 ‘안녕하세요’를 소개합니다.
요즘은 이웃들 간에 인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잘 모릅니다. ‘안녕하세요’에서 아이(큰아들 미노루)는 말합니다. 어른들이 아무런 필요도 없는 인사를 왜 하느냐고. 아이 입장에서 보기에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날씨가 좋네요” 같은 단순한 인사말들은 살아가는데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1959년 일본에서 그 나이는 인사를 빼먹더라도 TV를 보러 달려가는 게 더 급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인사는 안하고 가니?” 큰소리로 물어보면 그때야 잽싸게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달려 나가지 않았던가요. 그러면서 우리는 결국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요?
공동주택의 비슷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 대해 훤히 알고 지내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웃끼리 사소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집니다. 날마다 접촉이 많으니 별 것 아닌 마찰과 오해, 구설수도 많습니다. 보수적인 이웃들로부터 문제아로 손가락질 받는 신세대부부는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집에는 동네 꼬마들이 늘 들끓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신세대부부와 접촉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지요.
그 집에 모이는 아이들 중 미노루와 이사무 형제는 부모에게 텔레비전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부모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지만 어린 두 아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불만을 표시합니다. 가족들에게는 물론, 학교나 이웃사람들에게까지 계속되는 침묵의 시위는 재밌는 에피소드를 연출합니다.
고모가 맛있는 과자를 사왔지만 군침만 삼키고 아무 말도 안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끝말잇기를 시키지만 말을 할 수 가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급식비를 받아야 하는데 말은 못하고 몸짓으로 이런저런 표현을 하는 데 그 동작이 배꼽을 잡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차분하고 느린 영상과 잔잔한 삶의 조각들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미소 짓습니다. 영화를 본 후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가볍게 소주를 한 잔 기울이면서 ‘맞아, 그랬던 거야’ 하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즈넉하게 일상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이웃집 거실을 스크린으로 옮겨놓은 듯.
‘안녕하세요’는 오래된 사진들, 옛 앨범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1959년이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칼라필름으로 기념사진을 찍던 1960~70년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동네에 TV가 몇 대 없던 시절. 시골에서 부잣집 마당에 모여서 권투 세계타이틀 전이나 김일의 레슬링 경기를 보던 때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자기 집에 TV를 들여놓던 날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아마 오즈의 ‘안녕하세요’가 될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처음 사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나 거의 똑같은 아련한 추억의 실타래가 풀려나갈 것입니다. 마치 오랜된 흑백 사진 한 장을 보는 것처럼.
동네 아이들 삼총사가 등하교 때 하는 방귀놀이는 정말 재밌습니다. 천진난만합니다. 친구가 이마를 꾹~ 누르며 방귀가 나와야 합니다. 타이밍과 소리가 잘 나야 이기는 게임입니다. 아이들은 고구마를 먹으며 연습도 합니다. 한 친구는 방귀를 뀌다가 실례(?)도 하지요.
오즈 야스지로는 구로자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와 더불어 일본이 배출한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들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그는 주로 가족관계 이야기를 통해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 일본 사회의 소시민성, 인간사이의 소통 문제를 언급합니다. 특히 일명 '다다미 쇼트(Shot)'라는 그만의 독특한 촬영기법이 유명합니다. 카메라를 앉은 키 정도에 맞추고, 롱 테이크로 잡아내는 '다다미 쇼트'는 오즈 야스지로 특유의 촬영 방식으로 일본 영화의 독특한 영상 미학을 대표하는 카메라 움직임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감독이 등장인물의 눈높이에 맞춰 촬영하는 것이 표준인데,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방바닥 생활을 하는 일본인들의 눈높이에 카메라 앵글을 맞춥니다. 이 촬영기법은 서구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미를 보여줍니다. 또,가끔씩 이야기의 흐름과 상관없는 정물 풍경 화면을 끼워 넣으면서 공간이 주는 정서를 강조했는데, 이런 정물 풍경의 삽입화면을 서구 평론가들은 '베개화면(pillow shot)' 또는 '두루마리 화면(scroll shot)'이라 불렀습니다.
53편의 영화를 만들어낸 약 35년에 이르는 활동 기간 내내 그는 영화계의 주류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쉽게 모방하지 못할 정도의 개인적인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오즈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만의 엄정한 형식미로 의미를 비추는 방식에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서 그는 살아가는 데서 느끼는 기쁨과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던 오즈는 자신의 테크닉을 점점 하나의 스타일로 정립하면서 세대 차, 가족 내에서의 죽음, 자녀 혼인 문제, 실직 등과 같은 보통 사람들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의 일들을 자신만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세계 어디나 일상이란 비슷합니다. 여유롭지 못하던 시대의 생활은 더 유사하지요. 오즈의 시선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을 바라보고 있기에 보편적입니다. ‘안녕하세요’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공감입니다. 그것은 가난해도 즐거웠던 옛날의 추억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린 날 그림일기를 다시 들춰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오즈의 영화는 결코 어렵거나 딱딱하지 않습니다. 감동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보면 호흡이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생각할 여유를 위해서 필요한 호흡입니다. 오히려 요즘 보면 각박한 현실에서 조여져 있던 마음을 풀어주고 느슨하게 만들어줄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오즈의 영화가 주는 몇가지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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