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를 한꺼번에 부어 먹는 사이 있을 수 있고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는 부류도 있다.
SNS에 '탕수육과 당파 싸움'이란 글이 화제다.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탕수육 먹는 방법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글이 해학적이고 재밌다. 소개한다.
< 탕수육과 당파싸움>
조선시대 탕수육이라는 중국의 새로운 메뉴가 들어오자 많은 신하들은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많은 신하들이 이 탕수육을 어떻게 먹을것인가 논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어야 한다는 동인과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어야 한다는 서인으로 나뉘게된다.
동인은 평소에 거침없이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던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따랐으며 서인은 이황과는 다르게 소심하게 탕수육을 찍어먹던 이이를 당의 종주로 삼았다.
처음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던 동인이 대다수였고 서인의 세력은 작았다. 따라서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게 정답인양 굳어졌는데 이 방법을 주장하던 동인도 둘로 나뉘어졌으니 온건파로서 소스를 붓기전에 상대에게 붓는다고 동의를 구하는 남인과 과격파로서 그냥 포장지를 뜯자마자 바로 소스를 붓는 북인이다.
광해군 시기 북인은 남인과 서인을 몰아내고 탕수육을 상대의 동의없이 막 소스를 부어 먹었으며 이는 서인들로 하여금 크나큰 분노를 가지게 만든다.
그러던 중 식사때 북인은 동의도 없이 소스를 붓다가 탕수육소스가 아닌 짬뽕국물을 부어버리는 대사건을 일으켰으며 이에 극도로 분노한 서인은 반정을 일으켰고 북인은 축출되며 그 이후부터 탕수육에 소스를 동의없이 붓는 행위는 패륜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며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게 정석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먹어야 제맛이라는 남인들이 있어 두 당은 열심히 싸웠고 이는 탕수육을 어떻게 먹는것이 옳은가라는 예송논쟁으로 더욱더 격화된다.
예송논쟁.
탕수육을 한번만 찍어먹는게 예법에 맞는가 소스에 푹담궈 세번은 담궈먹어야 예법에 맞는가를 두고 서로 격하게 입배틀을 벌였다.
현종이후 집권군주였던 숙종은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걸 좋아하는 인현황후와 그냥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버리고 먹는걸 좋아하는 장희빈의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며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걸 공인했다가 다시 소스에 찍어먹는걸 공인하는등 갈팡질팡한다. 그러한 와중에 서인과 남인의 갈등은 점점 극으로 치닫게 된다.
그와중에 정권을 잡은 서인은 조금만 담그고 먹는 노론과 오랫동안 푹담그고 먹는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노론은 탕수육을 그렇게 푹 담궈서 찍어먹으면 애시당초 소스를 부어먹는것과 뭐가 다른가라며 소론을 공격했고 소론은 소스를 부어먹는것도 그렇게 나쁘지않다면서 남인에게 우호적이었다.
노론의 거두 송시열. 그는 탕수육을 소스에 오랫동안 담그는 행위 자체를 사문난적으로 보았다.
노론,소론,남인이 서로 치열하게 다투자 집권한 영조는 탕평책을 제시하여 절반은 소스를 붓고 절반은 찍어먹는 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영조 자신도 노론쪽으로 기울어진 왕이었고 점점 탕평책은 그 힘을 잃은채 빛이 바래지게 된다.
그러던중 사도세자는 소스를 찍은 탕수육을 간장에 찍어먹다가 영조에게 분노를 사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게되고 이런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인 세력이 시파가 되고 사도사제에게 부정적인 세력이 벽파가 된다. 시파는 간장좀 찍어먹을 수 있지 벽파가 사도세자를 미친놈으로 모함하고 음해했다면서 사도세자를 감쌌고 벽파는 소스를 찍었는데 무슨 간장을 또 찍어먹느냐 그건 미친놈이나 할짓이다 라며 사도세자에 비판적이었다.그와중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고 정조역시 탕평책을 주장하며 노론 소론 남인등 각 세력들을 화합하려고 애쓴다.
탕수육, 어떻게 먹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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